정미7조약 맺은 매국7적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5회] 군대해산에 따라 국가의 마지막 버팀목 사라져 > 관련자료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505
어제
2,053
최대
5,609
전체
398,086
박재혁 아카데미
  • H
  • HOME 박재혁 아카데미 박재혁 아카데미
박재혁 아카데미

정미7조약 맺은 매국7적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5회] 군대해산에 따라 국가의 마지막 버팀목 사라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거비 조회 1,758회 작성일 2020-12-14 21:05:42 댓글 0

본문


정미7조약 맺은 매국7적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5회] 군대해산에 따라 국가의 마지막 버팀목 사라져 


970529869736a610cd849ee94d3ea638_1608512726_8896.jpg

▲ 이토 히로부미 ⓒ 눈빛출판사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내정을 장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음흉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초대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5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부대신으로 삼은 이 친일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 등으로 구성되었다. 을사늑약의 논공행상에 따른 인사였다. 
 
이들은 1907년 7월 24일부터 서로 경쟁적으로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의 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들은 이 해 6월 헤이그 특사사건을 트집잡아 고종을 협박하면서 조약체결을 서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앞서 고종은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 을사늑약이 자신의 뜻에 반해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고자 했다. 


970529869736a610cd849ee94d3ea638_1608512775_3445.jpg

▲ 이상설 ⓒ 충청리뷰



그래서 고종은 이 해 4월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만국회의에 나가 우리의 실상을 만천하에 알리도록 조처했다.

이에 따라 이상설은 전 평리원 검사 이준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전 러시아 공사관 서기 이위종을 대동하고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과 영국 등의 방해와 열국의 외면으로 한국대표들은 회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970529869736a610cd849ee94d3ea638_1608512818_9447.gif

▲ 고종 황제


이 사건을 빌미삼아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했다. 그리고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7개항의 조약, 즉 '정미7조약'을 정부대신 '7적'을 상대로 하여 체결했다.
 
조약안은 일본이 한층 강력한 침략정책을 수행할 목적으로 법령권제정ㆍ관리임명권ㆍ행정권의 위임 및 일본인 관리의 채용 등을 강제하는 7개안으로 마련되었다. 일본은 이 조약안을 이완용 내각의 협조를 얻어 전혀 수정하지 않은 채 그날로 황제의 재가를 받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하여 7월 24일 밤 통감사택에서 이토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정미7조약에는 이에 덧붙여 각 조항의 시행에 관해 협정된 비밀조치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는 조선군대의 해산ㆍ사법권ㆍ경찰권의 위임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일본인에 의한 차관정치가 실시되어 우리나라는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군대해산에 따라 국가의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졌다. 이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무장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정미7적 #이상설 #헤이그특사 #고종#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