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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지사 박재혁을 아십니까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①회] 의열투쟁사에 샛별과도 같이 찬연히 빛나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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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거비 조회 1,651회 작성일 2020-12-06 20:41:0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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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지사 박재혁을 아십니까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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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 박재혁 의사. 박재혁(朴載赫) 의사의 1920년 9월 14일 부산 경찰서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에 대한 폭탄 투척으로 의열단 투쟁을 시작된다. ⓒ 박석분



27세, 아무리 정도가 사라지고 패도가 판치는 배역의 시대라고 해도 그 나이에 삶을 접기에는 너무 아까운 청춘이었다.

왜놈의 밥 한 끼도 먹지 않겠다는 결기로 단식을 결행한 지 9일 만이다. 대구감옥, 1921년 5월 27일의 일이다. 한말 의병장 면암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왜놈의 것이라면 물 한 방울도 마시지 않겠노라 단식 끝에 순국한 지 15년 뒤에 일어난 일이다.
 
잔혹한 고문과 의거 당시 입은 부상, 계속된 단식으로 만신창이가 된 청년은 그러나 숨질 때까지 의식은 또렷했다. 면회 온 동지들이 단식을 중단할 것을 권했지만, 왜적의 형률로 죽느니보다 차라리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겠다면서 꼿꼿하게 죽음을 맞았다. 죽음을 택한 청년은 그 순간 충의와 지절, 기개의 문인 지사였던 송나라 문천상(文天祥)의 <절필시>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공자는 살신성인하라 하시고
맹자는 사상취의하라 하셨나니
오직 충의로움을 다해야만
인에 이르는 소치노라
성현의 책을 읽을 제 
배운 바 무엇이겠는가
오늘 이후에는 
부끄러움을 면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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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의 부산경찰서 모습 왼쪽 건물은 일본거류민사무소, 가운데 건물은 부산이사청, 오른쪽 건물이부산경찰서.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청년은 상하이에서 김원봉 의열단장으로부터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처단하라는 명을 받고, 일본을 거쳐 단신으로 귀국하여 대범하게 서장실로 들어가서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 한다"고 유창한 일본말로 매섭게 꾸짖고, 그에게 준비한 폭탄을 던졌다. 1920년 9월 14일 오전이다.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의 장쾌한 투탄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한민족의 의기를 천하에 떨쳤다.
 
하시모토는 얼마 후 숨을 거두고 청년은 검거돼 사형이 선고되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의열투쟁이 전개되었지만, 적의 소굴로 들어가 적장을 처단하기는 거사가 유일하다. 일제에는 그만큼 충격이 컸다. 의열단의 여러 의거 중에서도 성공한 사례에 속한 거사였다. 

한민족은 1919년 3ㆍ1혁명이 비폭력 독립시위인데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피검 46,948명 등의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일제는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더욱 가혹한 무단통치를 자행하였다. 
 
3ㆍ1혁명의 좌절로 한국 사회는 패배의식이 뒤덮이고 어디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 시점에서 감행된 청년의 부산경찰서장 처단 의거는 동포들에게 다시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청년들에게는 항일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꺼져가는 독립운동에 다시 심지를 돋우고 불을 붙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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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혁의사. 박재혁의사 생가 부근 독립운동가 골목 모습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청년의 이름은 부산 출신의 박재혁(朴載赫).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면서 부산상업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독립정신이 강하여 친구들과 우리나라 역사책을 프린트하여 비밀리에 배포하고, 지하서클 구세단(救世団)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소년 투사였다. 
 
졸업 후 중국 상하이와 홍콩, 싱가포르를 왕래하는 상업에 종사하면서 김원봉이 주도한 의열단에 가입한 후 단신으로 국내로 들어와 악질 부산경찰서장을 처단하고 긴 단식 끝에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우리 의열투쟁사에 샛별과도 같이 찬연히 빛나는 분이다.
 
그럼에도 국민 대부분은 박재혁 의사의 거룩한 삶과 독립투쟁, 애국정신을 잘 알지 못한다. 교과서는 물론 웬만한 독립운동사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기 어렵다. 무후선열(無後先烈)들이 그렇듯이, 박재혁 의사도 이 땅에 혈육 한 점 남기지 않고 조국해방전선에서 산화함으로써 흔적이 별로 없다.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생명을 바쳐 일제와 싸운 의열지사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몇 분 외에는 대부분이 낯설다.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표현한 대로 "셈해지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박재혁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셈해지지' 않아서는 결코 안 될 분이다. 출신지인 부산에서만 인식되는 선열이 아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일관된 자주독립정신, 27세라는 젊은 나이, 적의 소굴에서 적장을 처단한 용기, 3ㆍ1혁명 좌절 후 침체된 독립운동에 불쏘시개 역할, 단식으로 생을 마감한 결기, 무후선열이라는 가족사…등 박재혁 의사를 기려야 할 조건은 충분하고도 넘친다. 
 
히틀러의 광신적인 나치와 줄기차게 싸우다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저항작가 슈테반 츠바이크의 헌사를 박재혁 의사의 영전에 바치면서, 평전을 시작하고자 한다.  

나의 모든 친구들이
길고 긴 밤 뒤에 찾아오는
붉은 해를 볼 수 있기를,
그러나 무엇보다
참을성 없는 나는①
당신들보다 먼저 간다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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