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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독립운동가 찾기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②화] 이름도 성도 없이 독립전선에 나섰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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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거비 조회 2,885회 작성일 2020-12-06 20:51:5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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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독립운동가 찾기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평전 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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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혁 의사 동상 부산어린이대공원 안에 있다.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말이 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현대인은 수도꼭지 틀면 물이 나오고 마트에 가면 생수가 쌓여 있어서 '물의 근원'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없다. 
 
독립운동(가)에 관해서도 비슷한 것 같다. 해방된 지 70여 년이 지나고, 그런 것 아니어도 관심사가 많고 시험준비생도 아닌데 굳이….
 
생리적으로 하루라도 물을 마시지 않으면 신체 건강을 유지하기가 어렵듯이,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독립운동(가)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수천년 동안 나라 잃고 세계 각처를 유랑했던 선대의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듯이, 우리도 나라를 빼앗기고 고난의 시대를 살았던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 고갱이는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동안 친일세력과 군사독재, 그 아류들이 장기간 집권하면서 독립운동사는 소략되거나 외면받았다. 심지어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최근까지 독립운동사를 정규과목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언론에서도 3ㆍ1절이나 광복절이면 반짝 관심을 보이는 듯 하다가 지나면 그만이다. 그마저 명망가 중심으로 재탕 삼탕을 일삼는다. 그래서 여성독립운동가 하면 유관순 열사 외에 달리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동안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천 명 정도이다. 독립전선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진 분들이 많지만, 까다로운 심사과정, 무엇보다 후손이 증빙서류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무후선열들의 경우는 대(代)가 끊어져서 서훈 신청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서훈을 받은 1만 5천여 독립운동가 중에는 혁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일반에는 낯섦의 지사들이 대부분이다. 정부의 각종 이벤트는 물론 연구가나 언론이 명사들만 조명하기 때문이다. 박재혁(朴載赫) 지사도 그중의 한 분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선 분들은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 엄청난 희생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의열사들이 일제와 싸우다 사망하거나 투옥되고, 요행히 풀려나도 일제의 감시로 생업에 종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서 자손은 물론 4, 5대에까지 저학력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해방 후 극소수는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교과서에도 실리고 각종 매체에서 조명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잊혀진 채 '보훈대상자'로 기록될 뿐이다. 그마저 후손이 없거나 자료의 인멸로 묻힌 분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독립군관이 10년 동안 3,500여 명인데, 현재 이름이라도 밝혀진 분은 10분의 1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나머지는 그야말로 이름도 성도 없이 독립전선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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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암 류인석 선생의 영정 구한말 거유(巨儒)의 한 분이자 항일의병전쟁의 선구적 지도자인 의암 류인석 선생의 영정. ⓒ 정홍철



한말 큰 유학자 의암 유인석(1842~1915)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 반대 상소를 시작으로 김홍집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장으로 나서 충주와 제천 등지에서 친일관료를 죽이고 일제와 싸우다가 만주와 러시아로 망명했다. 뒷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 의군도 총재에 추대되어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다. 
 
유인석은 선비로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거병하면서 당시 조선의 처지에서 유학자들이 택해야 할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자신은 결연하게 실천에 나섰다. 유인석은 선비들이 국난기에 선택할 행동지침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첫째, 의병을 일으켜 역당을 쓸어낼 것(擧義掃淸),
둘째, 은둔하여 옛것을 지킬 것(去之守舊),
셋째, 나서지 못할 처지라면 목숨을 끊어 뜻을 이룰 것(致命遂去).

 
의암은 이 같은 지침을 제자들에게 제시한 후 직접 의병장으로 나섰다.

유인석이 제시한 '처변삼사'는 유학자나 선비들의 몫만은 아니었다. 망천하망국가(亡天下亡國家)의 위기를 당해 이 땅에 생을 부여받아 사는 모든 생령들에게 주어진 명제이고 한편으로는 의무이기도 했다. 경술국치를 당해 순국한 매천 황현은 <절명시>에서 "내가 여기 자결할 뿐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처변삼사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면암 최익현은 "모두 죽으면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는가"라고 분개하며 노구를 이끌고 직접 의병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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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신채호 선생. ⓒ wiki commons 


단재 신채호는 "과거 수 십년 역사야말로 용자(勇者)로 보면 타매(唾罵)할 역사가 될 뿐이며, 인자(仁者)로 보면 상심(傷心)할 역사가 될 뿐이다"라며 "국난을 당해 현실에서 도피한 자는 은사이며, 굴복하는 자는 노예이며, 격투하는 자는 전사이니, 우리는 이 삼자 중에서 전사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주창하며 스스로 '전사'가 되었다. 그는 또 "양병 10만이 일척(一擲)의 직탄(炸彈)만 못하다"는 내용으로 <의열단선언>을 지었다.  
 
국권침탈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세 부류의 군상이 존재하였다.

왕조시대의 기득권자들이 계속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매족ㆍ매국에 앞장 선 친일매국노, 왕조의 은덕을 입지 못한 신분인 데도 국권회복에 신명을 바친 의병ㆍ독립운동가, 나라가 망하든 말든 세상 변하는 대로 따라 살겠다는 여세추이파(與世推移派)가 그것이다. 일반 대중이야 논외로 치더라도, 기득권층ㆍ식자들이 나라를 망치고 민족을 배신한 것은 용납되기 어렵다. 
 
세계 식민지 역사상 가장 잔혹했다는 평을 받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나서기는 보통 용기과 신념이 없이는 결단하기 어려웠다. 당시 일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두 강대한 대륙국가를 제압한 세계적인 군사강국이었다. 거기에 영국과 미국 등 해양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특히 오랜 사무라이 전통으로 사람 목을 무우 자르듯이 하는 야만성, 그리고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과 영국제 엔필드 소총을 개량하여 만든 스나이더 단발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얼마 후부터는 기관총까지 보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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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화문광장 동북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동학혁명기, 동학군은 낡은 화승총과 죽창ㆍ농기구로 무장한데 비해 일본군은 최신식 병기로 무장하여 쌍방의 화력이 250 대 1 수준이었다. 해서 2개 사단도 안 되는 일본군에 동학군 30만 명이 학살당하였다. 일제는 통감부 시절에 총포화약류단속법을 공포하여 조선의 모든 병기를 수거했다. 그래서 맹수가 나타나도 이를 퇴치할 병기 한 자루 없었다. 
 
이런 처지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 하기였다. 죽음과 죽임을 각오하지 않으면 나서기 어려운 싸움이었다. 하여 의열투쟁의 전법이 나타났다.
 
자기 몸을 던져 일제와 싸우는 전법, 안중근의 단지동맹,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애국단 등이 이에 속한다.

박재혁 지사는 악질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正)을 처단하고 27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단식 끝에 순국한 의열단원이다. 이를 기억하는 분이 몇이나 될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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