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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의 생애와 부산경찰서 투탄(投彈), 박철규(Park Chul-kyu), 부산광역시시사편찬위원회,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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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거비 조회 102회 작성일 2021-01-15 12:16: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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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의 생애와 부산경찰서 투탄(投彈), 

박철규(Park Chul-kyu), 부산광역시시사편찬위원회, 

2019 항도부산 Vol.37 NO.- 191-248(58페이지)



<초록보기>

 

박재혁(朴載赫)1895517일 범일동 183번지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15세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과 생활했다. 1911322일 부산진사립육영학교를 졸업하고, 1915322일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제4회로 졸업했다.

박재혁은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중에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등과 함께 동국역사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했다. 3학년 때에는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오재영 등과 구세단(救世團)을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단보를 발행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배포했다.

박재혁은 19176월 부산을 떠나 3년 이상 상해와 싱가포르 등지를 왕래하면서 인삼 등의 무역업에 종사했다. 동시에 동지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기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신심을 다져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부산경찰서가 타격대상으로 지목된 것은 당시 의열단이 3.1운동 이후 기존의 독립운동노선에 방향전환을 선언하고 조직됐는데, 1차 국내기관총공격 계획이 19206월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관련자 전원이 체포됐다. 이에 의열단에서는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거두어 이를 반전시켜야 할 필요성 요구됐기 때문이다. 또한 부산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관문이며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개발됐으며, 2의 오사카로 불렸기 때문에 상징성이 컸다.

거사 준비 과정에서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가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역업을 하던 경험을 살려 중국 고서 상인으로 위장했다.

1920914일 오후 230분 경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공무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하시모토 서장의 오른쪽 가까이 접근하자, 서장이 집무를 멈추고 그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자신이 의열단임을 밝히고 투탄했다. 당시 하시모토 서장은 경상을 입었다. 박재혁도 부상을 입어 탈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박재혁은 부산지법의 1심부터 1921331일 진행된 경성고법의 3심까지 일관되게 '살인미수죄'가 적용됐다. 박재혁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의 공소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진행된 재판에서는 원심이 파기되고 박재혁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박재혁은 19213313심인 경성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박재혁은 체포된 후 고문과 폭탄 투척 당시의 상처로 고통을 겪는 와중에 폐병까지 얻게 되었지만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1921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