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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보훈청 온라인 기자단] 박재혁 의사 비를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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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거비 조회 359회 작성일 2020-09-07 23:02:5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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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부산지방보훈청 온라인 기자단 임현준 입니다.

부산의 현충시설을 탐방하여 오늘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동에 있는 공립초등학교인 부산진초등학교에 방문하여 의사 박재혁의 비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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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과 같이 부산진초등학교에 들어오시면 바로 뒤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충시설이 학교 안에 있어서 생소하긴 하였는데 기는 매우 쉬웠답니다^^보시는 바와 같이 사진은 2010년 9월에는 육군교육사령부 창설지 표지석 설치 및 자매결연을 체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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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표지석 

부산진초등학교는 1911년 5월 3일에 공립부산진보통학교로 개교하여, 1922년 11월에 현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이후 1992년 10월에 부전국민학교를 분리하였으며, 1996년 3월 1일에 부산진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박재혁 의사가 거사 몇 시간을 앞두고 사진관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

[부산 개성고 역사관 보관 사진 촬영]


국민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고, 일제에게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했습니다.

조국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며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 타도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었으며,

이 의열단에 있던 박재혁 선생도 이러한 활동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고국에 돌아와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부산 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지며 스스로 독립운동의 정점을 찍었던 박재혁 선생.

그 분의 강렬했던 일생과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식민통치의 상징인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박재혁 선생은 1895년 5월 17일 부산 범일동에서 3대독자로 출생했습니다.

15세가 되던 해에 부친이 별세하여 가세가 기울었으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며 박재혁 선생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최천택, 오택, 박흥규, 김인태 등과 가까이 지내며 조국광복을 위한 비밀결사대인 구세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구세단은 매달 등사판 잡지를 발간하여 동지를 규합하다 6개월만에 경찰에게 탄로나 박재혁 선생을 비롯한 4명은 1주일간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구세단 자진 해체를 약속한 뒤 풀려났습니다.


국내외에 걸친 독립운동을 모색하면서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왜관의 무역회사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끝내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해 1917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며 중국에 있는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조우했습니다.

1920년 8월, 의열단장이던 김원봉의 연락을 받고 상하이로 간 박재혁 선생은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국에서의 거사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부산으로 건너와 폭탄 1개, 군자금 3백원, 여비 50원을 받은 선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을 폭파하기 위해 처음에는 총독부를 폭파하려했으나 박재혁 선생의 입국이 일제에게 발각되어 탐문되기 시작하자 빠르게 거사를 치르기 위해 부산의 일제식민통치의 상징인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부산경찰서장이던 하시모토가 중국고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박재혁 선생은 중국인으로 가장한 뒤 중국 고서상으로 행세하며 고서에 폭탄을 숨겼습니다.

9월 14일 오후 2시 30분경, 경찰서장 하시모토에게 진기한 고서가 있다고 면회를 청한 뒤 하시모토와 마주 않게 된 박재혁 선생은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폭탄을 꺼내 유창한 일본말로 독립투사를 괴롭힌 죄를 꾸짖으며 폭탄을 터트렸습니다.

하시모토는 폭탄 파편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으나 박재혁 선생 역시 폭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중상을 입게 되었고, 폭탄소리를 듣고 들어온 일본 경찰들에게 그대로 피체되고 말았습니다.

박재혁 선생은 부산부립병원에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고, 선생의 거사는 성공적으로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응급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진 박재혁 선생은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받았고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언도를 받고,

이후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다시 상고하였으나,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받아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사형이 확정된 박재혁 선생은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으니 단식을 하겠다' 라며 단식을 하다 감옥 안에서 끝내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학창시절 동지들과 함께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끝내는 자신의 고향에서 역사적인 의거를 성공시킨 부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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