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나래] 부산에서 살펴본 순국선열, 동래부사 송상현과 박재혁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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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2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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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개인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하며 취재 및 촬영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힘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합니다. 또한, 통감부를 설치했고, 통감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것이죠.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뜻은 세계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를 대신 한다는 것. 쉽게 말하자면, 대한제국의 여권은 이제 효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한 나라에서 외교권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한데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는 하루도 을사늑약을 잊지 않았습니다. 을사늑약이 다가오면 찬밥으로 식사를 하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다고도 하죠.

 

1939년에는 이 날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약속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회의 총회 때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지청천 장군과 차이석 선생 등이 매년 11월 17일을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대한독립투사들의 넋과 충성심을 기리는 날로 지정하자고 밝혔는데요. 이른바 ‘순국선열의 날’이 시작됐습니다.

 

순국선열의 날은 광복 후 민간단체 주관,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리다를 반복하다가 1997년, 국가유공자의 요청에 따라 국가기념일로 재지정됐는데요. 현재까지 매년 11월 17일에 순국선열의 행사를 진행하며, 그 주간에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순국선열을 기리고 있습니다.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부산을 대표하는 순국선열은 누가 있을까요? 임진왜란 때, 끝까지 왜에 맞서 싸웠던 동래부사 송상현과 올해로 100주기를 맞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가 있습니다.

 

충렬사 앞 충렬탑

 

동래부사 송상현과 충렬사

동래부사 송상현의 본관은 여산이며, 시호는 충렬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관으로 동래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에 맞서 싸웠는데요. 당시 부산진첨사 정발이 지켰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곧바로 동래성에 다다랐습니다.

 

전투에 앞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라는 글귀를 적어 송상현에게 보여줍니다. 지나갈테니 길을 열어달라는 뜻이지요. 고니시 유키나가의 글귀를 본 송상현은 이렇게 답합니다.

 

戰死易假道難 (전사이가도난)

전사이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말. 이에 동래성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음에는 왜군을 막았으나, 조총을 앞세워 결국 동래성은 함락됐고, 송상현은 직전에 자결하며 조선왕실에 충성을 다합니다.

 

이를 본 고니시 유키나가는 비록 적장이긴 하지만 그의 용기에 감탄했고, 정중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뤘습니다. 또한, 추모비까지 세웠다고 하는데요.

 

충렬사의 모습

 

현재 송상현은 부산를 지킨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예명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요. 부산시 양정동에는 송상현 광장이 있고, 송공 삼거리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송공이 바로 송상현을 뜻하는 말. 또한, 부산을 지키는 53사단의 별칭이 충렬인데, 충렬은 송상현의 시호인 충렬에서 따왔습니다.

 

그리고 충렬사가 있습니다. 부산지하철 4호선 충렬사역에서 도보 3분 거리인 충렬사는 송상현을 모신 사당 송공사로 시작됐습니다. 이후 1624년 선위사 이민구의 건의로 충렬사라는 이름으로 바꿨는데요. 송상현과 함께 부산진첨사 정발을 함께 모시게 됩니다.

 

수많은 위패가 봉안돼 있습니다

 

이후 수많은 부속 건물과 함께 서원의 기능이 추가됐고, 조영규, 윤흥신 등을 포함해 현재는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데요. 충렬사는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했을 때 살아남았던 47개 서원 중 하나입니다. 현재 부산에서는 UN기념공원과 함께 부산의 현충원의 느낌이 강합니다.

 

실제로 본 충렬사는 현충원과 공원의 경계 같았습니다. 충렬사 앞 작은 공원에는 부산 시민이 여가를 즐기고 있었는데요. 충렬사의 가장 높은 곳, 위패를 모시는 곳에는 엄숙함이 가득했습니다.

 

박재혁 의사 비와 박재혁 거리

부산에는 또 한 명의 위인이 일본을 막았습니다. 바로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 1895년, 부산에서 태어난 박재혁 의사는 학생 시절부터 항일 단체를 조직하며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후 부산공립상업학교(現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해로 떠났는데요.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의열단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는 등 악명이 높았던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를 암살하려 했습니다. 적임자를 고민하던 의열단은 부산 출신인 박재혁 의사를 선택합니다.

 

1920년 9월 14일, 박재혁 의사는 하시모토 서장의 취미가 고서적 수집이라는 것을 알고, 중국인 고서적 상인으로 가장해 부산 경찰서를 찾습니다. 예상대로 하시모토 서장과 면회를 할 수 있었는데요.

 

박재혁 의사는 하시모토 서장을 향해 폭탄을 던졌고, 중상을 입은 하시모토 서장은 얼마 후 사망했습니다. 경찰서 일부도 폭탄에 의해 파괴됐고요. 박재혁 의사 또한 중상을 입고 체포돼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하지만, 박재혁 의사는 일제에게 사형을 당하는 것 보다 옥중에서 자결하기로 생각했는데요. 결국, 단식으로 인해 1921년 5월 11일,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박재혁 의사의 의거는 의열단과 독립운동가에 전하는 메시지가 상당했습니다. 먼저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넣었고, 의열단 최초로 성공한 의거였습니다. 이후 일제는 의열단을 가장 두려워했죠.

 

부산진초등학교 박재혁 의사 비

 

부산진초등학교에는 박재혁 의사를 기리는 의사 박재혁 비가 있습니다. 부산진초등학교에 왜 박재혁 의사 비가 있을까요? 부산진초등학교가 박재혁 의사의 모교이기 때문입니다. 개교 70주년을 맞았던 1981년, 정공단에 있던 비를 부산진초등학교로 이전했고, 박재혁 의사의 정신을 좋은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범일동 앞 KT 전화국 앞 사거리부터 조방로 630m 구간을 박재혁 거리로 명명했습니다. 박재혁 거리에는 독립운동가 박재혁 거리를 알리는 표지판과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박재혁 의사 비에 대한 설명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먼저 죽은 열사를 뜻하는 순국선열(殉國先烈). 비록 순국선열의 날은 지났지만, 순국선열을 기억하는 마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찾은 부산의 순국선열. 순국선열을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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