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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의사 부산경찰서 의거 100주년 기념식 열린다

등록 2020.10.27 09: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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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 경찰서서 터뜨려

[서울=뉴시스] 부산경찰서 폭파 거사 전날인 1920년 9월 13일 동기 최천택(오른쪽)과 촬영한 박재혁 의사(왼쪽). 2020.10.27. (사진=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 부산경찰서 폭파 거사 전날인 1920년 9월 13일 동기 최천택(오른쪽)과 촬영한 박재혁 의사(왼쪽). 2020.10.27. (사진=보훈처 제공)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오는 28일 오전 10시 부산상공회의소(국제회의장)에서 '박재혁 의사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제100주년 기념식'을 연다고 27일 밝혔다.

이날 행사는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이경재) 주관으로 열린다. 코로나19로 참석인원이 축소된 가운데 박삼득 보훈처장을 비롯해 변성완 부산시장 권한대행, 김원웅 광복회장, 출신학교 재학생, 기념사업회 회원 등 50여명이 참석한다.

박 의사는 부산 출신으로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와사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일했다. 그는 왜관(倭館)에서 무역상회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주인으로부터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해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8년 6월 귀국했다.

박 의사는 보통학교와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말하고 기회를 노리던 중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갔다. 그는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한편 여러 독립투사들과 교제했다.

그는 1920년 3월에 귀국했다가 8월에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00원을 받아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그 서장을 사살할 것을 계획했다. 박 의사는 폭탄을 휴대하고 상해를 떠나 같은 달 9월6일 부산에 상륙했다.

박 의사는 14일 오후 2시30분에 고서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등에 지고 경찰서로 서장을 찾아 서장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몇 마디 환담을 한 후 고서를 꺼내는 척하면서 폭탄을 꺼내들었다. 그는 서장을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고 폭탄을 던져 폭발시켰다. 서장은 부상을 입었고 박 의사도 중상을 입은 채 붙잡혔다.

박 의사는 기소돼 1920년 11월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언도를 받고 항소했지만 1921년 2월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상고했지만 1921년 3월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다시 사형을 언도받아 형이 확정됐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폐병까지 얻어 고통을 겪었다. 박 의사는 "왜적(倭賊)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손으로 죽자"며 단식하다가 형 집행 전에 옥사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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