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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자랑 의열단원 박재혁이 없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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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거비 조회 564회 작성일 2020-09-16 21:38: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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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자랑 의열단원 박재혁이 없다(1) 

기획/특집 /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2019-05-22 12:05:09 


영남알프스 역사문화 기행

한 사람의 궤적을 찾아가다가 부산에까지 이르렀다. 통도사에 “박영효·김홍조·김정훈”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태극기 제작자이자 철종의 부마로 개화운동을 하다가 일제강점기 친일인사로 살았다. 김홍조는 박영효의 절친이지만 울산의 선각자로 구포(경남)은행, 경남신문, 삼산자동차(주) 등을 경영하며 개화운동을 했고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했다. 김정훈은 김홍조의 딸 김순원의 남편이다. 그는 1908년 양산 상삼마을에서 왜병과 싸우다 죽은 만석꾼 김병희와 교상의 적손이다. 그는 사업과 자선활동을 하다가 대구교남학교 인수를 하려다 실패한다. 그 후 김순원의 사망 이후 1929년 재혼을 하는데 그가 바로 박명진이다. 박명진은 부산경찰서 투탄을 한 박재혁의 여동생이었다


개인적 사료를 남기지 않은 독립투사, 박재혁 

박재혁은 의열단의 첫 성과로 부산경찰서 투탄을 한 부산 독립유공자 1호다. 지난 3개월 동안 박재혁 의사의 흔적을 찾다가 놀라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첫째 그에 대한 기록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즉 그는 어떤 말과 글도 남겨 놓지 않았다. 다만 3장의 사진만 존재한다. 졸업사진, 단체사진, 최천택과의 사진이 그것이다. 둘째 그가 다닌 학교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게 없다. 보통학교는 기록이 없고 상업학교는 불탔는지 남은 기록이 없다. 셋째 결국 남은 자료는 세 종류다. 친구인 최천택과 오택의 유고, 일제의 공식문서인 경찰 조사와 재판 기록 그리고 당시의 신문 보도다. 친구의 자료들을 가공한 자료는 구체적 근거가 없다. 이렇게 자료가 부족하니 현재 박재혁 의사의 업적을 기록한 내용은 오류가 많고 유적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그는 어떠한 기록도 자신이 남기고 않았고, 집안 내력도 알려진 것이 없다, 위인전의 자료로 가장 빈곤한 사람이 바로 박재혁이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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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성지곡수원지에 있는 박재혁 동상 


박재혁이 없는 박재혁 거리

1895년 박재혁은 부산 범일동 183번지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범일동 183번지에 살았다. 현재 범일동 KT 앞 거리가 ‘박재혁의 거리’다. 박재혁은 1916년부터 1920년까지 20대 청년 시절에 무역상으로 상하이와 싱가포르에서 지냈다. 범일동 550번지는 1919년 6월부터 1920년까지 박재혁이 없는 가족이 살았던 집이다. 박재혁이 상해로 갈 때 경북 왜관의 친척 박국선에게 703원을 빌린 적이 있다. 그 빚 독촉으로 집을 팔아 이사한 곳이다. 따라서 자성대 근처의 박재혁의 집은 실제 박재혁의 생가터나 삶터가 아니다. 2012년에 만들어진 박재혁의 거리는 표지판과 안내판 정도만 보이며, 의열단원 박재혁의 흔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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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공단 앞 거리는 독립 의열의 거리다.

생가터인 범일동 183번지는 현재 범일 좌천동 가구거리의 공용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도 역시 박재혁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생가터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다. 생가터의 거리는 일신기독병원이 있는 정공단 길이다. 정공단은 임란 때 왜적과 싸우다 죽은 정발 장군을 모신 제단이다. 이 거리에서 박재혁과 친구들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나도 고교 3년 동안 이 거리를 등하교 하면서 다녔다. 그때 나는 이 거리가 부산 독립만세운동과 의열단의 거리인 줄 몰랐다. 지금도 모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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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진초등학교에 있는 박재혁의 비, 원래는 정공단에 있었다. 


부산 정공단 길의 아이들

부산은 일본의 대륙 진출 입구이자 일본으로의 수탈 출구였다. 1910년대 부산진지역의 매립과 매축으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부산진 조선인 마을은 초가집이 아니면 산기슭의 판잣집으로 대부분 살기 어려웠다. 본격적으로 매립되기 전에는 바다가 가까이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터는 가까운 증대왜성과 자성대, 정공단이었다. 이곳은 임란 때 왜적과 싸운 곳이다. 자연스레 망국의 시절, 강제병합의 시절에 반일 항일적인 놀이터였다. 하지만 개항과 더불어 근대화의 물결을 받아들이고 일본인 진출에 따른 경제적 혜택으로 친일적 의식과 반일 저항적 민족의식이 형성되는 이중적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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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공단 길의 친구들. 박재혁, 오택, 최천택, 김인태, 왕치덕.


 

아이들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오늘을 목 놓아 우노라’라는 글을 읽고 울분을 삼키기도 했다. 또 1906년 대마도에서 순직한 최익현의 장례식을 부산에서 목격하고 참가하기도 한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부산지역에서 41건의 모금 참여가 있었다. 그중에 13건이 범일 좌천지역이었다.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여성 부인회, 부산육영학교와 개성학교 부산분교(좌천학교) 학생들도 동참했다. 일본인의 침략과 그 폐해에 대해 가장 절실하게 여긴 지역이었기 때문에 더 적극적이었다. 지역과 부인, 학생의 국채보상운동은 자연히 범일 좌천동의 청소년들의 항일 반일 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들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지 몰랐다. 일부는 친일로, 일부는 항일로 또는 그냥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삼일운동만세의 깃발을 들었다. 박재혁은 의열단원으로 부산경찰서에 투탄을 했고, 최천택은 부산의 핵심적인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신간회 부산지회장을 했다. 오택은 의열단과 신간회 활동 그리고 신문사 지국을 경영했다. 김병태는 의열단 활동을 하다가 중국 난징에서 사망했다. 또 왕치덕은 용호동에서 일광병원을 운영하며 사회운동을 했다. 김인태는 상해 임정요인으로, 의열단원으로 독립운동 전선에 헌신했다. 


학교는 배움터이자 활동터다

근대문물과 개화로 정공단 인근 지역에 교육 공간이 많이 생겼다. 사립육영학교(1907, 부산진보통학교), 좌천학교(1908), 부산일신여학교(1895, 현 동래여고), 부산공립상업학교(1911, 구 부산상고, 현 개성고)가 그곳이다. 박재혁(1895~1921), 최천택(1896~1962)은 사립육영학교을 다녔고, 주례동의 오택(1897~1948)은 좌천학교를 1년 남짓 통학한 후 전학을 갔다. 박재혁은 1910년 부친의 사망으로 두 살배기 어린 여동생과 모친과 같이 생활한다. 세세 청빈하고 찬 집에 살았던 가정이라. 마땅한 생계수단이 없던 모친은 삯바느질을 했다. 그는 보통학교 졸업 후 바로 상업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박재혁과 최천택은 1911년 3월 22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오류가 발생한다. 최천택은 1905년 육영재에서 한문을 배우고 1908년 사립부산진보통학교에 입학해 1912년 3월 23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1회)를 정근상을 받고 졸업했다. 한 살 많은 박재혁은 부산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 1912년 이후 졸업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그는 1912년 이전 사립부산진보통학교를 졸업했기에 어디에도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동국역사> 배포 사건과 구세단 사건에 연루된 박재혁

1912년 박재혁, 최천택, 오택은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한다. 그들은 각각 한 살 차이가 난다. 1912년 17세의 최천택은 우리 역사 공부가 중요함을 절감하고 소장하고 있던 <동국역사>를 복사 출판하고자 등사판(謄寫版)을 구입해 하학(下學) 후에 자필로 원지(原紙)에 옮겨 쓰고, 한편 찍어내 배부했다. 박재혁, 김병태, 박흥규가 참가했다. 하지만 부산경찰서 형사가 덮쳐 최천택은 10여 일간 고초를 겪고 6월 4일 풀려났다. 그는 이후 일본인 형사의 감시를 받는다.


한편 1913년 봄 결혼한 17세의 오택이 좌천동으로 이사했다. 한약방을 운영한 부친을 둔 오택은 의전(醫專)에 다니고 싶어했기에 공부는 뒷전이었다. 2학년 여름방학 때 양산, 언양, 영천, 대구 등지를 다니며 동지를 규합한다. 그는 어떤 이유인지 1914년 3학년 진급이 못 돼 중퇴하고 일본으로 갔다. 나이에 맞지 않게 신사 양복과 장발을 하고 고급가방에 인삼 4~5근을 넣은 그는 현금 5천 원을 소지하고 일본 형사의 감시와 동행 하에 조선 귀족의 대접을 받으며 일본의 고베, 오오사카, 교토 등지를 다녔다. 의대에 다니려고 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결국 귀국한다.


1915년 오택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산상업학교 재학 때 배일사상이 농후한 박재혁, 박흥규, 김인태와 합의해 부산진 죽마고우 10여 명을 호선하고 비밀결사단 ‘구세단’을 조직한다. 매월 월간 잡지를 등사판으로 발행하고, 경남 각지의 동지를 규합했다. 출판물로 의사소통하며 수양 강좌와 실천운동을 벌였다. 박흥규는 출판을, 김인태와 오택은 재정을, 김원봉은 선전을 담당했다. 이렇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다가 6개월 뒤 어느 날 부산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쳐 오택의 집을 가택 수색한다. 인장, 등사판 등을 압수당하고 오택, 박흥규, 김인태, 박재혁은 구속돼 1주일간 심한 고문을 당했다. 재력가인 오택 부모의 주선과 구세단 해산을 조건으로 무사 방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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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후 박재혁의 무덤 앞에서 오택.
 


구세단 활동은 1913년 또는 1914년으로 본다. 부산상업학교의 <동국역사> 사건과 구세단 사건의 공통 인물은 박재혁과 박흥규다. 최천택과 오택은 서로의 기록에 같이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따로 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재혁은 두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것이 분명하다. 두 사람과 달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그가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마음은 적극적이었지만 경제적 곤란으로 소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두 사건에 그의 구체적 활동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박재혁의 경제적 문제는 늘 그의 삶의 그림자였다. 현재 박재혁의 부산상업학교 학적부에는 인적 사항만 있고 성적, 출결 등이 기록돼 있지 않다. 아마 1916년 3월 8일 학교가 화재로 전소되면서 관련 기록이 소실된 듯하다. 그래서 그의 학창시절을 엿보기 어렵다. 그는 학교 자료가 없는 독립투사다.


최천택이 <동국역사> 배포 사건(혹은 구세단 사건) 때문에 1년 늦게 졸업했다고 하지만 그는 1915년 3월 22일 박재혁과 함께 부산공립상업학교(4회)를 정상 졸업했다. 오택도 졸업했다고 하지만 졸업명부에 그의 이름이 없다. 현재 성지곡 수원지에 있는 박재혁 동상에 새겨 있는 1911년 3월 22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졸업은 사립부산진보통학교 졸업으로, 1914년 부산공립실업학교 졸업은 1915년 3월 22일 부산공립상업학교 졸업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또 재판 기록도 엉터리다.

취업, 혁명 그리고 청춘의 꿈

박재혁은 상업학교 졸업 후 취업난에 봉착했다. 20대 청년으로 3대 독자로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했다. 그는 모유가 없어 우유 수유한 부자 한약방집 아들 오택의 도움을 받았다. 박재혁과 오택은 미국행을 꿈꾼다. 최천택은 합천금융조합에 취직하고, 박재혁은 조선가스전기회사의 전차 차장으로 있다가 경북 왜관의 곡물 무역상 박국선의 집에서 일한다. 오택은 인삼, 고추, 마늘, 명태, 해초 등을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잡화를 수입하는 ‘조선명물공사’를 경영한다. 20대의 청년에게 독립운동보다 젊은 꿈이 먼저였다. 그런 와중에 1916년 말경 박재혁은 어학연구를 목적으로 무단가출해 안동현을 거쳐 상해의 중화국청년회관(中華國靑年會館)에 입학했다. 김인태는 상해에서 임정 활동을 하고 김원봉과 만났다. 최천택은 친척 일을 도와주며 무장투쟁의 길을 모색했다.


1917년 6월 박재혁은 곡물상 주인을 달래 704원을 얻어 상해로 건너갔다. 그 후 싱가포르를 오가며 무역상 활동을 했다.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오택의 도움을 받았다. 박재혁은 인삼을 팔고, 생고무판을 보내 고무신 등을 만들라고 오택에게 보내지만 화학지식과 창조력이 없어 하지 못한다. 박재혁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나라에 갔지만 쉽게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동안 식민지 조선과 반식민지 중국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망국의 비애를 충분히 느꼈고 독립운동에 대한 염원도 가슴 한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친구 중 가장 활발히 독립운동을 하는 친구는 김인태였다. 그는 김원봉과 가까웠다. 1919년 2월 김인태는 국내에서 오택을, 일본에서 최천택을 만나 3.1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한다. 오택과 최천택은 국내의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선다. 운동 이후 오재영은 경찰의 검거수배를 피하기 위해 오택으로 이름을 바꾸고, 각 도의 동지를 규합해 ‘연통제’로 독립운동을 했다. 최천택은 장구적 실제적 운동을 위해 청년운동에 매진한다.


이병길 보광중 교사, 역사질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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