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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박재혁 학교를 가다]비대면영상해설 ⑪의열공약 10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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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거비 조회 797회 작성일 2021-07-03 18:03: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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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공약 10


1921331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인 경성고등법원에서 최종 3심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사형이 확정되고 대구감옥에 투옥된 박 의사는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의열단에 가입할 때 의열단 공약 10항 중 제1항인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와 제2항인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다는 공약을 실천하기로 다짐했습니다.

 

192155일 의형제를 맺고 재학시절부터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부산공립상업학교 동창인 최천택이 계란꾸러미를 들고 면회를 갔을 때 박 의사는 왜놈 손에 욕보지 않기 위해 며칠 째 단식 중이라면서 가져간 계란꾸러미를 도로 내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님께는 큰 불효이나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만남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192151111시경 단식 끝에 옥중 순국하였습니다. 이날 12시에 사형이 집행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박 의사는 조국이라는 큰 를 위해 작은 나를 바친 것입니다. 박 의사의 순국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최천택이 514일 시신을 인수하여 고관역에 도착하여 장례준비를 했습니다.

 

악독한 일제는 장례마저도 엄격히 통제하여 모여든 조문객도 강제로 해산시키고 남자 2, 여자 3명만 참가시키고, 입관 때도 인부 2명만 참가하도록 엄하게 제한하였습니다.

 

묘소는 좌천동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가 1969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여 모셨습니다.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은 역사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남겼습니다.

. 3.1운동 실패 후 독립운동의 실마리를 찾던 중 의열단이 창단되어 지금까지의 얌전하게 하던 독립운동을 무장투쟁으로 해야만 된다는 신호탄을 쏘아올리면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 박 의사의 의열단 첫 성공사례 후 조선의 청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줌으로써 이후 우후죽순처럼 무장투쟁의 형태로 독립운동이 전개되게 하였습니다.

. 독립운동가로서의 책임과 의무, 나아가 독립운동가의 신념과 사생관을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는 평가입니다.

. 동지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진 심문에도 끝까지 단독범임을 주장하여 부산경찰서에 체포되어 있었던 동료들 6명을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나게 하였습니다.

. 특히 일제에게 조선의 통치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아울러 조선인의 자주독립정신을 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저항정신, 의열투쟁의 맥락을 민족사에 남겨 국혼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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